146.[경제] 우리가 은행의 VIP고객인 이유 - 은행 가치의 60%는 당신의 무관심에서 나온다
많은 일반 가정에서는 매달 전기세, 인터넷 요금, 보험료가 통장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갑니다. 통장 잔액을 마지막으로 들여다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시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은행 계좌는 그냥 '거기 있는 것'이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최근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서 나온 연구보고서 “Dynamic Competition for Sleepy Deposits”를 보다가 스스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혹시 나도, 은행이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고객인 건 아닐까 하고요.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Mark Egan 교수와 Adi Sunderam교수 연구팀은 2002년부터 2023년까지 164개 은행과 신용조합의 2천5백만 개 이상의 계좌를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는 꽤 놀라웠습니다. 매년 전체 예금자의 무려 94%가 더 높은 이자를 주는 곳이 있어도 그냥 같은 은행에 돈을 두고 산다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이런 고객들을 '졸린 예금자(sleepy depositor)'라고 불렀습니다. 잠든 것처럼 자기 돈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계좌가 닫히는 경우도 대부분 더 좋은 조건을 찾아서가 아니라, 이사를 하거나, 계좌 주인이 세상을 떠나거나, 은행이 먼저 정리하는 경우였습니다. 스스로 떠나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렇다면 은행 입장에서 이 '졸린 고객들'은 어떤 의미일까요? Egan교수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은행 가치의 약 60%는 예금자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새 고객을 유치하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이 듭니다. 연구에 따르면 새로운 예금 1달러를 끌어오는 데 은행은 15센트를 잃고, 그 고객이 '졸린 상태'로 정착해서 수익을 내기까지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반면 이미 잠들어 있는 고객에게는 굳이 높은 이자를 줄 필요가 없습니다. 고객도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요. 금리가 오를 때도, 시장 경쟁이 치열할 때도, 은행은 언제 적극적으로 예금자를 붙잡고 언제 조용히 '수확'할지를 전략적으로 계산합니다. 연방준비제도가 2022년과 2023년에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빠르게 올렸을 때, 많은 은행들이 예금 금리는 천천히 올리면서 대출 금리는 빠르게 올렸던 것을 기억하시나요? 그 틈에서 이익을 본 쪽이 어디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연구팀은 졸린 예금자가 없어졌을 때 은행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구체적인 수치로 추정했습니다.
- 대형 은행의 부도 위험 상승 - 졸린 예금자 없이는 대형 은행의 부도 위험이 평상시에도 10퍼센트 포인트 높아지고,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빠르게 올리던 2022~2023년 같은 수익 압박 상황에서는 20퍼센트 포인트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 신규 고객 유치 비용 부담 - 새로운 예금 1달러를 끌어오는 데 은행은 15센트를 잃습니다. 광고, 높은 금리 제시, 직원 상담까지 모든 과정이 비용입니다. 그 고객이 '졸린 상태'로 정착해 수익을 내기까지는 1년이 넘는 시간이 걸립니다.
- 중소형 은행의 존립 위협 - 운영 비용이 높거나 금리 경쟁력이 부족한 중소형 은행은 예금자들이 일제히 깨어난다면, 즉 높은 이자율을 찾아 옮긴다면 은행 가치의 최대 80%를 잃을 수 있습니다. Egan 교수는 말합니다. "만약 변동금리 예금같은 제도가 도입된다면, 돈은 중소형 은행에서 대형 은행으로 빠르게 이동하게 될 것입니다."
- 금리 상승기의 이중 압박 완화 - 금리가 오르는 시기에는 대출 수익은 줄어드는데 예금자마저 떠난다면 은행은 양쪽에서 동시에 압박을 받습니다. 졸린 예금자들은 그 압박을 버텨내는 완충재 역할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었습니다. 온라인으로 계좌를 개설한 고객들이 지점을 직접 방문해서 만든 고객들보다 오히려 더 '졸린'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온라인 계좌는 이사를 가도 그냥 유지되고, 특별히 발걸음을 옮길 필요가 없으니 더 쉽게 잊혀집니다. 또 자동이체를 새 은행으로 옮기는 번거로움, 공과금 납부처를 하나하나 바꿔야 하는 수고로움이 많은 분들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합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더욱 그렇지요. 소셜시큐리티 수령 계좌, 의료보험 자동납부, 각종 구독 서비스까지 연결된 계좌를 바꾼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나이가 드실수록 이 성향은 더 강해집니다. 연구에서도 나이 든 예금자일수록 은행을 바꿀 확률이 낮다고 밝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나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연구팀은 졸린 예금자들이 사실 미국 금융 시스템의 안정성을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는 점도 함께 밝혔습니다. 만약 모든 예금자가 금리 조건을 꼼꼼히 따져가며 수시로 은행을 갈아탄다면, 중소형 은행들은 버티기 어려워지고, 결국 대형 은행으로 돈이 쏠리는 쏠림 현상이 심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의 '졸림'은 시스템 전체를 부드럽게 굴러가게 하는 완충재이기도 한 셈입니다. 나의 무관심이 미국경제를 떠받치고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조금 더 똑똑하지 못했던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의 마지막 말은 제 귀에 오래 남았습니다. "특히 금리가 오르는 시기야말로 예금 조건을 비교해볼 좋은 타이밍입니다." 은퇴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예금 금리 1%의 차이는 생각보다 큰 금액으로 쌓입니다. 고수익 저축계좌(High-Yield Savings Account)나 단기 CD(Certificate of Deposit)을 한 번이라도 비교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1년에 한 번, 봄맞이 대청소를 하듯 내 예금 금리도 한 번 들여다보는 습관, 그것만으로도 내 노후 자산이 조금 더 나를 위해 일하게 됩니다. 은행이 나의 무관심을 고마워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깨어 있는 예금자가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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