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은퇴준비] "죽을 때까지 일만 하실 건가요?" - 철학적인 은퇴준비

 

요즘 주변을 보면 은퇴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열정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엘론 머스크나 피터 틸 같은 유명 인사들은 "은퇴는 패배자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뛸 기세죠.

저 역시 일터에서 느끼는 보람과 활력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최근 Fobes에 소개된 Mark Edmundson교수의 글을 읽으며 한 가지 깊은 생각에 뒤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멈추지 않는 것'만이 정답인 시대에 살고 있는 걸까요? 혹시 우리는 인생의 마지막 숙제를 외면한 채 앞만 보고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보통 은퇴를 하면 여행을 가거나, 친구들을 만나고, 요즘 유행하는 피클볼같은 운동을 배우는 즐거운 생활을 꿈꿉니다.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은퇴는 아동기, 청년기, 중년기처럼 우리 생애 주기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발달 단계'입니다.

힌두교에는 '산야사(Sanyassa)'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가 세속의 소유물을 내려놓고, 지팡이와 발을 들고 떠나 자신의 영혼과 다가올 죽음에 집중하는 단계죠. 달라이 라마 또한 은퇴의 목적을 '품위 있고 자비로운 방식으로 삶을 즐기며, 동시에 죽음을 평온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은퇴를 미루고 죽을 때까지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 언뜻 보기엔 성실하고 숭고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에만 매달리다 갑작스럽게 준비 없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면, 우리는 공포와 분노에 휩싸이기 쉽고 예상치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바로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오는 거대한 분노입니다.

영국의 시인 Dylan Thomas는 그의 유명한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노년은 저무는 날에 불타오르고 포효해야 하니. 죽어가는 빛에 맞서 분노하고, 분노하라(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하지만 에드먼드슨 교수는 이 '분노'가 남겨진 이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는지 목격했습니다. 평생 누구보다 선하고 다정했던 한 지인은, 죽음이 턱끝까지 차오르자 주변 모든 이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을 오진(Misdiagnosed)했다고 믿는 의사인 친구를 원망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생전 해본 적 없는 모진 말들을 내뱉었죠. 그 분노는 가족들에게 회복하기 힘든마음의 상처를 입혔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한 인간의 고결함을 순식간에 무너뜨린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는 바로 이 지점을 경계합니다. 그는 우리가 은퇴를 통해 삶의 속도를 늦추고 죽음을 연습(Rehearsal)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명상(Meditation)을 통해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제행무상(Impermanence)의 진리를 가슴 깊이 새기는 시간 말입니다.

우리가 은퇴를 통해 사회적 역할을 내려놓는 연습을 미리 하지 않는다면, 마지막 순간에 "왜 하필 나인가? 왜 벌써인가?"라는 패닉에 빠지게 됩니다. 몽테뉴가 말했듯, 사람은 아무리 상태가 나빠도 "나에게는 아직 10년이 더 남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존재니까요.

결국 은퇴는 단순히 '노는 시간'이 아니라, 내 존재의 유한함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훈련의 장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거부하며 소리 지르는 노인'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을 담담히 응시하는 평온한 어른'으로 기억되기 위한 소중한 유예 기간인 셈입니다.

우리가 은퇴를 통해 삶의 속도를 줄여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 존재의 덧없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 노인'이 아닌 '평온한 어른'으로 기억되기 위한 연습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철학적인 은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제가 늘 강조하는 재정적인 안정은 바로 이 평온함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 생존을 위한 자산에서 평온을 위한 자산으로 - 은퇴 자산 설계 시, 단순히 '얼마를 더 벌까'가 아니라 '내가 품위를 유지하며 명상과 성찰에 집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이 얼마인지를 먼저 계산해 보세요.
  • 단순화의 기술 - 은퇴시기에는 복잡한 투자 자산이나 관리하기 힘든 부동산은 정리하고, 현금 흐름을 단순화하여 신경 쓸 일을 줄이는 것이 지혜입니다.
  • 관계의 정리와 회복 - 노후의 인간관계는 양보다 질입니다. 나를 소모시키는 관계는 정리하고, 내가 떠난 후에도 따뜻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소수의 사람에게 집중하는 시간의 투자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은퇴는 커리어의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대면하는 가장 용기 있는 시작입니다. 오늘 하루는 계좌 잔고 확인 대신, 내 마음이 얼마나 평온한지 한번 들여다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평온함이야말로 우리가 노후에 가질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자산입니다. 성공한 노후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떠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댓글

  1. 너무나 중요한 부분입니다. 은퇴도 죽음도 인생에 한 부분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철학적인 메세지가 담겨 있는 글이네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장항준감독이 앞으로 좋은 노인이 되고 싶다는 말에 동년배로서 동감을 하면서 이 말이 정말 깊이가 느껴졌고 오늘 블로그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답글삭제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