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은퇴준비]돈은 복리로 자라지만, 시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 '0원으로 죽기' 철학

 

상담현장에서 자주 보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은퇴 후 넉넉한 자산을 가지고 계셨고, 젊은 시절부터 꿈꿔온 여행지 목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생기자, 쓰는 것이 불안하다고 하셨습니다. "좀 더 있다가," "몸이 더 좋을 때," "아이들 다 자리잡으면.."이라는 말을 반복하시다가, 결국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행은 여전히 가능했지만, 그분이 꿈꾸던 그 자유로운 여행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돈은 있었습니다. 시간도 있었습니다. 단지 타이밍이 어긋났을 뿐이었지요.

요즘 미국에서 'Die With Zero'라는 개념이 조용히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Bill Perkins가 쓴 책에서 출발한 이 철학은, 재정적 성공을 얼마나 많이 모았느냐가 아니라 그 돈을 얼마나 의미 있게 썼느냐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처음 들으면 다소 도발적으로 느껴집니다. 평생 아끼고 모은 분들께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철학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다 써버려라"가 아닙니다. "당신의 돈이 당신의 삶을 위해 제때 쓰이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돈은 복리로 자랍니다. 그런데 시간은 복리가 없습니다. 한 번 지나간 60대는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타이밍입니다. 많은 분들이 자산이 가장 넉넉할 때와 몸이 가장 건강할 때가 같은 시기가 아니라는 현실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재산은 70대, 80대에 정점을 찍는 경우가 많지만, 활동성과 에너지는 이미 한참 전에 기울기 시작합니다. 미국에 오랫동안 사신 한인 분들 중에는 특히 이 간극을 크게 경험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민 1세대, 또는 그 영향을 받은 세대는 절약을 미덕으로 배웠습니다. 저축은 곧 성실함이었고, 씀씀이는 곧 무절제였습니다. 그 가르침 덕분에 오늘의 많은 자산이 쌓였지만, 동시에 그 가르침이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 더 아껴야 해"라는 내 안의 목소리로 남아 있습니다. 재정 계획이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심리의 문제가 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물론 이 철학을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의료비 상승은 얼마나 될지 예측이 어렵고, 시장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으며, 기대수명은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은퇴 후 생활이 20년, 30년에 걸쳐 이어질 수 있는 현실에서 "다 쓰면 된다"는 생각은 오히려 노후를 위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철학이 핵심은 무모함이 아니라 균형입니다. 소셜 시큐리티, 연금, 또는 보수적인 인출 전략으로 기본 생활을 단단히 받쳐두고, 그 위에서 유연하게 삶을 즐기는 구조입니다. 시장이 좋은 해에는 조금 더, 흔들리는 해에는 조금 덜. 그리고 건강과 가족 상황, 우선순위가 바뀔 때마다 계획을 다시 점검하는 것, 그것이 'Die With Zero' 철학을 책임감 있게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재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제가 가장 자주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를 모아야 충분한가요?"라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고요. "어떤 삶을 꿈꾸시는가?" 어렵게 모은 자산이 결국 한 번도 제대로 쓰이지 못한 채 남겨진다면, 그것은 재정적 성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손자손녀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으신 분, 오래 미뤄온 여행을 꿈꾸시는 분, 혹은 자녀에게 살아있는 동안 의미 있는 도움을 주고 싶으신 분  지금이 바로 그 대화를 시작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나의 지금 시즌에 맞는 계획을 한번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돈이 당신의 삶을 따라가도록, 내 삶을 위해 일하도록 설계하십시오.


댓글

  1.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최근들어 했지만 이 또한 내 죽음을 알수 없기때문에 가늠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넘치는 것이 모자란 것보다는 나은 걸로 생각하며 하지만 그것을 위해 너무 심신이 힘들다면 의미는 퇴색되겠지요. 하루하루의 삶에 감사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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